언어술사, 녹스머신, 유랑화사, 타임패러독스, 갈증

방 정리를 하다 전등 장식에 이마 한가운데를 맞아서 살이 푹 파이는 바람에, 거기 다이아몬드라도 박으면 부처님이 될 거 같은 흉터가 져 버렸다. 이 꼴로는 놀러도 갈 수 없다. 꾸역꾸역 방이나 정리하는데 또 언제 왜 사놨는지 모를 책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어서 읽어봤다.

1. 칸바야시 초헤이 초기작품집 <언어술사> (미정발)

1893년 하야카와문고 초판. 일본에 놀러갔을 때 고서점에서 산 거 같은데 그리 희귀한 건 아니다. 뒤표지에는 이지적인 이마와 청순한 단발머리가 돋보이는 젊은 칸바야시 선생의 사진이 박혀 있다.

"나는 언어술사"라고 검은 옷의 남자는 말했다. [무슨 짓이에요? 말하는 걸 들키면 경찰에 잡혀간다고요.] 라고 너는 텔레파시로 말했다. ---질서를 흐트리고 파괴하는 모든 언어 활동이 금지당한 무언세계를 무대로, 언어를 생물로써 조종하는 언어술사에 의해 본의 아니게 반사회행위자가 된 남자의 행보는..... 언어에 대한 SF적 어프로치를 시도한 표제작 <언어술사> 및, 인간과 커뮤니케이트하는 화성의 바위 이야기 <스핑크스 머신> 등, 신예의 재기를 가감 없이 전하는 6개의 단편을 수록.

이것이 뒤표지의 소개문이다. 내가 읽은 건 딱 표제작 언어술사뿐이다. 언어를 살아있는 것처럼 다룬다, 언어를 마술처럼 조작한다, 그런 '언령' 모티프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래, 너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있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편은 마지막 1줄에 이르기 직전까지 2인칭으로 진행한다. '언어' 자체에 세상을 만들거나 파괴할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읽고 쓰고 말하는 언어사용이 일체 금지된 세계. 주인공 '너'는 정신감응에 의한 가상현실체험형 오락장치인 '스푸르'를 감상하는 것만을 낙으로 삼고 있다. '너'는 스푸르 장치에서 '배경에 장미를 아름답게 피워내는 일'에 재능이 있어 삼류 스푸르 극의 배경맨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만의 스푸르를 만들고 싶어 홀로 남은 스푸르 제작 창고에서 스스로 '언어술사'라 칭하며 금지된 행위인 '말'을 하는 이상한 남자와 만난다.

뜬금없이 등장한 남자는 언어란 생명처럼 살아있으며 자신은 이를 부릴 수 있다고 단언하며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는 남자의 말을 믿기는 커녕 [함부로 그런 짓을 하다 들키면 사형이다!]라며 기겁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무덤에서 무덤으로'라는 소설은 어떤 말로 시작하는데요?]
"미묘해. '색시를 얻으러 무덤으로 갔다'라는 거지. 애매한 문장이야.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걸 썼어. 쓴 다음에 깨달았지. 이건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이 주인공이 무덤에 가는 건 틀림없어. 거기 색시가 될 여성이 있는 거지. 예를 들어 그녀의 옛 연인의 묘가 있어서, 묘소를 돌보러 오는 건지도 몰라. 혹은 그녀는 묘지를 관리하는 사무직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럼 '색시를 얻기 위해 무덤으로 갔다'고 쓸 필요가 없이 좀더 구체적인 표현이 가능했을 거야. 이건 어설퍼 빠진 문장이야. 너무 애매해. 그래서 난 이 문장을 버리려고 했는데, 생각을 고치고 언어의 목소리를 들어봤어. 이 문장을 버리지 않으면 다음엔 어떤 문장으로 이어야 할까. 솔직히 들으면 돼. 색시가 될 여자는 묘에 있어. 묘는 죽은 사람을 넣는 용기야. 그럼 이 여성은 죽었다는 소리지. 그걸 색시로 맞이하는 거니까, 그 여자는 움직여야 해. 아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자다. 그럼 죽었으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되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는 결혼할 수 없다는 가정을 한다면, 이 여자를 맞으려는 남자도 죽었다는 걸로 하면 돼. 알겠나? 언어는 이런 식으로 증식하네. 이 작품은 생과 사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핵을 중심으로 언어가 모여서 하나의 형태를 이룰 거야."

언어술사가 언어를 '다루는' 설명은 칸바야시 초헤이의 창작론이 아닐까 싶은 부분도 있다. 언어SF라 불리는 서브장르 중에서도 '언어가 곧 세상이다'는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다루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특별히 기교가 돋보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이디어에 충실해서 깔끔하게 완성해냈다는 점에 호감이 간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딘가 청량감이 감돈다. '언어'를 통해 작품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젊은 자신감도 인상적이다. 특히 마지막 한줄이 백미.

언어를 테마로 한 사변적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언어의 장벽이 있겠지만 한번쯤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2. 노리즈키 린타로 <녹스 머신>

4개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들러리 클럽의 음모>를 제외하면 다 읽었다.
<녹스 머신>, <바벨의 감옥>, <논리증발-녹스 머신2>. 일본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13년도 1위를 차지한 작품집인데,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너무나도 짙은 SF스멜에 거부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녹스 머신 2연작은 본격미스터리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하드SF. 양자역학이라거나 타임머신이라거나, '그쪽' 과학 용어가 잔뜩 나오는데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다. 동원되는 이론에 정합성이 있는지는커녕 과학적으로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재미있다. 내용뿐 아니라 순수 형식으로도 매력적인 '논리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튼 못 알아듣는 주제에 흥분돼서 잠도 못 자고 다른 '못 알아먹겠는 하드SF'책을 발굴해서 읽기까지 했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엘러리 퀸 작품을 연구하여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역할이 갖는 필연적 모순을 주제로 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그의 작업물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후기 퀸 문제'라 불리는 테마는 마치 괴델의 불확정성 정리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이처럼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허구세계를 탐구하여 수학적 모델을 모색할 정도로 사변적인 작가이니, 사변소설로서의 SF와도 궁합이 맞았던 것 같다.

<녹스 머신>은 '녹스의 십계'가 작성된 날짜에 시간상의 특이점이 있는 걸 발견한 미래인(?)들이 추리소설 연구자 유안 친루 박사를 그 날짜로 타임워프시키는 이야기.... 라고 해야 할까.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녹스의 규칙 제5번에 착안한 기상천외한 시간여행담이다.

<논리증발 - 녹스 머신2>는 양자정보로 보관된 추리소설 텍스트들이 테러범들이 계획한 양자 붕괴로 '불타오르고', 이 화재의 진화를 위해 다시 한 번 블랙홀을 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바벨의 감옥>은 외계종족에 의해 어딘가의 '감옥'에 갇혀버린 사념생명체가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 그런데 그 감옥의 정체는 사실....

이런 식인데, 줄거리만 던져놓고 봐서는 의미가 없다. 직접 읽지 않으면 그 기묘한 매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3. 정연 <유랑화사>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깔끔하게 쓰인 기담! 엄마를 잃은 새끼여우 리아와 그림을 실체화시키는 힘을 가진 유랑화사가 조선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겪는 이야기들이다. 최근 3권이 나와서 부리나케 서점에 갔더니 이미 다 나가버렸는지 없었다. 아! 유랑화사 3권 보고 싶다!


4. 영화 <타임 패러독스>

SF. 희대의 폭탄마 '피즐 바머'를 쫓는 시간 요원과 불행한 삶을 산 '미혼모'의 기기묘묘한 이야기다. 역시 시간여행담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그 기이함은 혀를 내두르고 싶을 정도다. 저예산인 티가 날 정도로 액션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반전'이라 할 법한 포인트는 3번 정도 있다.

이야기의 전체 구도를 말하면 스포일러가 된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반전이 충격적이었다기보다는 나에게는 '굉장히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이상적으로 본다는 것자체가 내겐 충격적이었다.

원작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있었다. 하인라인의 50년대 발표한 단편 <너희 좀비들>이다.


5. 영화 <갈증>

후카마치 아키오 원작의 소설 <끝없는 갈증>을 영화화.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다. '카나코'라는 소녀 = 마성을 잔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탐미적인 작품이었다.

1 2